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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마을 우토로의 역사 바로알기"

우토로 마을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것을 돕고자, 지금까지 나와있는 모든 기사와 모든 자료들을 조사해 우토로 마을 아픔의 역사를 연표로 구성해 봤습니다.

이것을 해서 알려야 하겠다라는 다짐을 많이 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 왔었는데 제게 갑자기 정말 바쁜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젯밤에 밤 세워서 기를쓰고 만들었습니다.

이글을 정리하며 느슨해진 제 마음도 다시 잡았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이글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일제강점기하에 일제가 행한 악행들을 다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니까요...

하지만 우토로 연표를 보시며 기억해 주십시오.

"닛산이라는 전범기업의 반성없고 비인도주의적인 악행들을...

기가막힌 한일협정이 우토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일본의 눈부신 발전속에, 철저히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우토로 마을을....

조국의 무관심속에 60여 년간 고통받는 우토로 마을을...."


강제동원되는 국민들...

1941.      교토 비행장 용지가 좌산촌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으로 결정.
1941.7.   (주)일본국제항공공업 설립
1941.8.   교토부가 우토로 토지를 매입.
             - 우토로에 한바(건설현장에 만들어지는 집단합숙용 가건물)가 만들어짐.

다시 돌아갈수 없는 조국...
1945.7.   일본 패전, 비행장 건설 중지, 13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이 방치됨.
1945.9.   미 점령군(GHQ) 일본국제항공공업 접수.
             - 우토로 한바는 주민의 저항으로 접수되지 못함.
             - 우토로 조선인학교 자주적 건립
1945.12. 일본국제항공공업 사장 A급 전범 용의로 연행됨 (1946년 석방)
1949.12. 일본 정부에 의해 우토로 조선인학교 폐쇄

한국전쟁으로 부활하는 전범기업 신일국공업
19??      일본국제항공공업이 회사를 신일국공업과 일국공업으로 분리
             - 명목상의 회사인 일국공업에게는 전쟁 책임 전가
             - 신일국공업은 트럭, 버스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재 탄생
1950~53 신일국공업 한국전쟁 특수. 6.25 계기로 부활한 전범기업
             - 동포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항공기 조립공장에서 미군용 자동차와 탄환을 생산
1952.3.   일본 경찰부대가 2회에 걸쳐 우토로 강제 조사
195?       6.25 전쟁 이후 비행장 터는 일본 정부가 사들여 육상자위대 주둔
             - 비행장 사택 일본 정부가 사들여 일본인들에게 불하
             - 우토로는 일본정부의 매입 불하 대상에서 제외
1961.      일국공업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 일관매수를 제안
             - 일국공업은 토지대금으로 수억 엔을 요구하자 주민 거절
             - 주민들은 전후 보상 차원에서 토지를 무상 불하주장

악덕기업 닛산차체공기의 등장
1962.      신일국공업 닛산차체공기에 합병
             - 우토로 토지 소유권 닛산차체공기로 넘어감

일본정부 전쟁보상 책임의 소멸

1965.      한일협정 체결
             -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전후 보상 요구에 응하지 않는 계기 마련

             - 전후 보상에 대한 개인 청구권 소멸, 보상은 조국에만...

재일조선인에 대한 닛산과 우지시의 차별정책
1970. 2.  우토로 주민 대표는 ‘토지 매각’을 요망하는 문서를 작성 닛산차체공기에 송부
              - 닛산차체공기는 주민요구 무시

1979.10.  우지시에 수도관 설치, 소화전 구비, 도로포장을 요청
             - 지주(닛산차체)의 승낙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

1983.      닛산차체 우토로 토지 매각 결정
             - 자칭 우토로 자치회장 히라야마 마스오(허창구)와 토지매각 협상
             - 토지 매각 협상사실 모른 채 일본 정부와 닛산차체에 전후보상 책임을 물어 무상 불하 요구
1985. 3.  화재가 발생해 창고와 민가 등 4채 전소
             - 지하수 오염으로 음용 불가 판정, 상수도 시설 미비로 화재 시 대응책 없음
1986. 6.   ‘우토로에 수도시설을 요망하는 시민의 모임’을 발족, 우지시내 서명운동 전개
1986. 8.   주민 381명의 서명을 첨부해 우지시에 수도 시설 요청서를 다시 제출

비극의 시작

1987.3.9.  허창구와 닛산차체 토지매매계약을 체결. 계약금액 3억 엔.
              - 주민들은 토지매매계약 사실 모르고 있음
1987.3.9.  닛산차체 수도관 시설 동의서를 우지시에 제출
1987.4.30  매입자금을 만들기 위해 민단 교토지방 본부장이었던 하병욱의 도움으로

               서일본식산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설립.

               이를 보증으로 허병욱은 허창구에게 토지매입대금 대출
1987.5.9.  서일본식산(하병욱)에게 4억4500만 엔에 우토로 토지 재 매각
              - 허창구는 서일본식산(하병욱)에게 토지를 4억엔에 매입했다고 속여 4억4500만엔에 매각 함
1988. 1.   우시지는 수도본관인 배수관의 매설 공사를 시작해 3월에 공사 완료
              우토로 약 절반 정도의 세대에 급수
1988. 3.   부동산업자들의 매매물건 답사로 허창구의 토지매입사실 알려짐
              - 허창구는 야반도주
1988. 9.   일본인 회사인 가나자와토건에 서일본식산을 매각
              하병욱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김(밝혀지지 않았음)
              민단의 소극적 태도가 하병욱(민단 교토지방본부장)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으로 보임

강제철거 통고와 싸움의 시작
1989.       서일본식산 우토로 주민들에게 철거 통고 시작
1989. 2.   토지를 인수한 서일본식산이 ‘건물수거 투지명도' 소송 제기
1989.3.    교토지법에서 첫 공판, 일본 시민들로 구성된 ‘우토로를지키는모임' 결성
1998. 1.   교토지법 패소 판결, 주민들 고법에 항소.
1998. 8.   일본 정부, 유엔사회권규약위원회에 2차 정부보고서 제출.
1998.12.  오사카고법 패소 판결, 최고재판소(대법원) 항소.
2000.       최고재판소 기각 결정.
2004. 1.   우토로 토지 등기부에서 소유자가 서일본식산에서 이노우에 마사미로 변경

조국의 관심과 무관심
2004. 9.   주일한국대사가 교토부 지사에게 선처 요청
2005. 2.   한국 NGO 우토로 실태조사
2005. 4.   <우토로 문제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우토로 시찰
2005. 4.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발족
2005.11.  반기문외교부 장관 국회발언

             "주민들의 자구노력, 또 민간모금, 이런 것을 봐가면서 정부 지원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2006.8.5  ‘우토로 살리기 희망 콘서트
2006.11   서일본식산과 이노우에 마사미간 소유권자간의 법적 분쟁 종료.(서일본식산 승소)
2007.6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국회발언  '역사성'과 '형평성'을 고려해서 지원이 가능한 방안을 계속 강구하겠습니다." 입장 후퇴
본국 귀환 또는 일본 내 사회시설 마련 시사
2007.7.16 ~9.30 우 토로의 마지막 호소 아고라청원 개시 (현재시간 기준 6697)
2007.7.22  철거위기 우토로 동포의 '마지막 희망순례'

우토로에 희망을~
2007.8.19  블로거 중심의 우토로살리기 운동 적극 전개
2007.8.31  토지협상기한 1개월 연장, 정부 적극적 대응 검토
               -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및 여야의원, 민간대책위 관계자, 정부부처 관계자 등이 참석하는 연석회의가 조만간 열릴 전망
2007. 9.1 아름다운 재단 - 우토로의 희망을 기다리는 마지막 30일 모금운동 개시

여기 저기 자료를 모아서 전체를 엮어 봤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좀더 자세히.....

↓↓↓↓↓

 

[상상을 초월하는 일제의 강제 동원자 수]


일제는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39년에는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였으나

조선에서는 한민족의 반발을 우려하여 모집 형식을 갖춘 강제동원을 시행하였다.

1941년에 일제는 국민 근무 보국 협력령을 시행하여 노동력 동원을 더욱 강력히 시행하였고,

1942년에는 대규모의 국민 동원 계획을 세우고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였다.

1944년에는 국민 징용령에 의하여 강제 연행 방법으로 징용제를 시행하였다.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은 일본 각지의 탄광, 수력발전과 철도 등의 공사장, 군사 공장 등에서

참혹하게 중노동으로 혹사를 당하 였다.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로 연행된 한국인 노무자 수는 1939∼1945년 사이에 약 113만 명에 이르 렀다. 또한 일제는 1944년에 여자 정신대 근로령을 공포하고, 12∼40세의 미혼 여성들 수십만 명을 군수 공장이나 전선으로 연행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으니 천추만대 일제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근로보국대는 1941년 '국민근로보국령'에 의해 조선인 노동력 수탈을 위해 일제가 강제연행하여 만든 조직편성된 것으로 철도·도로·비행장 및 신사의 건립 ·확장공사에 동원되었다.

각종 직장보국대를 비롯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고등과에서 전문학교 ·중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는 학도보국대, 형무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남방파견보국대 및 농민들로 조직된 강제노역보국대 등이 있었다.
농민보국대의 경우 징용·징발·징병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다시 이에 강제연행되었다. 근로보국대
형식으 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의 숫자는 1938~44년까지 약 762만 명 정도였다. 
 

<일본에서 출간된 책에 강제동원자수가 표기되어 있으나 강제동원자 수 보다는

강제동원 사실 입증 사료로서의 의미가 크다>


[강제동원된 우토로 마을 주민의 삶]


우토로 조선인 마을은 1940년 일제가 오사카와 교토의 방패막이 될 교토군비행장 건설 즉, 군비행장 활주로와 비행기, 조종사 양성소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는 일본국제항공공업과 더불어 낮은 임금과 강인한 노동력의 조선인을 동원,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합숙소로 함바가 세워지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밤낮없이 노동에 시달리며 사람이 살지 않는 자갈투성이 땅을 일구어 함바를 짓고 살았다.


 

<1940년대 우토로 마을의 모습>


 [일본항공공업의 설립]


1937. 5.       (주)일본항공공업 설립 (본사 오사카)
1939. 11.      (주)국제공업 설립 (본사 도쿄)
1940. 1.        교토비행장용지가 좌산촌(佐山村)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으로 결정
1940. 4.        국제공업교토공장 및 부속비행장 기공식
1940. 6.        우토로의 토지가 매수됨. 다음해 (주)일본국제항공공업 명의로 등기
1941. 7.        일본국제항공공업 설립 (양사가 합병. 본사 도쿄. 공장, 교토부
                   구세군 오오쿠보무라, 가나가와현 히라츠카시. 종업원 3000명)
1941. 8.        교토부가 우토로 토지를 매수
1941. 12.       영미양국과 개전
1943년경      우토로에 한바(건설현장에서 만들어지는)가 만들어짐
1944. 1.        일본국제항공공업을 군수회사로 지정
1945. 7.        오오쿠보공장을 미군이 폭격. 재폭격에 의해 공장 생산활동 정지

1945. 8.        일본 패전


[참고 : 함바란?]

 

‘함바’는 일본어의 ‘함바[飯場(はんば)]’에서 온 말로 일본어에서는 ‘노무자들의 합숙소’를 의미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작업장 근처에서 운영하는 간이 식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하였다.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우토로 마을의 함바 사진]


‘함바’는 일본어의 ‘함바[飯場(はんば)]’에서 온 말로 일본어에서는 ‘노무자들의 합숙소’를 의미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작업장 근처에서 운영하는 간이 식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하였다.

여기까지 내용을 좀더 자세히.....

↓↓↓↓↓

일본국제항공공업 츠다신고 사장이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다음해 석방된 것을 다루고 싶었는데

자료가 전무 합니다. 해서 GHQ(General Head Quarters)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조선인학교 건설운동과 GHQ·일본정부의 탄압

 

재일동포는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무엇보다도 민족교육을 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가 취한 조선인동화교육정책 극복이었다.

 

재일동포로서 빼앗긴 민족성을 되찾는 민족교육의 첫째 과제는 우리말을 되찾는 것이었다.

45년 9월에 결성된 재일조선인연맹은 조선인학교 설립에 집중했고,46년 10월 조선인학교는 초등 525개교, 중학교 4개교, 청년학교 10개교에 달했다고한다.(박종명 편 '재일조선인 역사·현상·전망)


그리하여 교육강령과 교육의 기본이념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학교운영을 개시했다.


재일동포의 자주적인 노력에 따른 학교건설운동이 앙양하는 가운데 한반도 남부의 민족자주권 운동과 민족반역일소 운동이 미군정의 통치 장애요소가 되자, 일본에서의 학교건설운동마저 같은 맥락으로 간주하여 GHQ는 조선인학교에 대해 억압정책을 실시한다.


48년에 들어서 일본정부도 GHQ의 정책에 호응하여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방침을 굳혔다. 일본정부는 48년 초, 조선인학교를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낸데 이어 전국의 조선인학교에 임대 교사의 양도와 사립학교로서의 인가신청을 요구했는데, 인가조건으로서 일본어만 사용할 것과 일본 교과서 사용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재일조선인은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인의 자주성에 맡길 것과 교육의 특수성을 인정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연속 발표했다.


폐쇄명령에 반대하는 조선인의 대중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 GHQ와 일본정부 당국은 '비상사태선언'을 발령하여 검거하는 실력행사로 탄압을 가했다.


이어 49년에는 연맹에 대해 '단체 등 규제령'을 적용하여 해산시키고 10월에는 또 다시 조선인학교 폐쇄를 강행했다.


- 민족시보(97.3.11) 중 일부 인용 -  


하지만 일본의 교육개혁은 


비록 일본의 교육개혁은 GHQ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1945년 11월 ‘교육쇄신위원회’의 설치, 일본의 교원 및 교육자 조합을 결성, 여성교육의 쇄신책으로서 여자대학 창설, 대학의 남녀공학제를 채택하였으며, 1946년 4월에는 민주주의 교육연구회를 결성하여, 공민교육 실시 및 신교육지침을 각 학교에 시달하였다.


이런 교육계획의 수행으로 일본의 민주화, 자유화가 정립되게 된다.('일본의 교육개혁' 일부 인용-류미라)



결국 미군주도의 GHQ는 일본에게는 교육을, 재일조선인에게는 교육기회 폐쇄라는 철퇴를 가했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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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으.. 2008/03/02 14: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잘은 모르겠지만.. 우토로 주민들이 힘겹게 살아 왔다는 건 알겠네요............... 후 제대로 좀 알고 싶기도 하지만... 모르는 단어들도 많고............. 하여튼.. 모두 잘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2. BlogIcon 픽토리 2008/04/19 15:5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정말 안타깝네요... 자료 잘보고 갑니다.